[무브먼트] 청년세대 담론의 등장과 변화

유래없는 청년실업에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의 청년들이 과거가 지금보다 차라리 나았다면서 종종 회상하는 시대가 다가왔다. 지난 지금 청년들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단어로는 ‘N포 세대’를 꼽을 수 있다. 2011년 경향신문의 특집기사에서 부터 시작된 삼포세대는 연애·결혼·출산 세 가지를 포기했다 해서 명명된 단어였다.
이후 청년들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취업·내 집 마련도 포기했다 하여 오포세대로 늘어나더니 인간관계·희망을 포기했다 해서 칠포세대, 건강·외모관리도 포함되어 구포세대를 넘어 삶까지 포기한다 하여 십포세대 혹은 완포세대 혹은 전포세대 등 여러 명칭이 나왔고 이를 통틀어 N포세대로 표현되고 있다.
포기학개론
청년들의 어려운 현실을 표현한 명칭들만 등장한 것은 아니다. 2008년 조선일보에서 등장한 ‘실크세대’(1971년생 이하 젊은 리더들로 구성된 실크로드CEO포럼에서 따온 단어로 당시 대한민국의 2~30대가 가장 위대한 세대라고 선언함), 2011년 문화일보에서 등장한 ‘G20세대’(동년 1월 3일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따온 단어로 세계를 무대로 뛰고 경쟁을 주저하지 않으며, 창조적 도전 정신에 불타는 청년들), 동년 동아일보에서 나타난 ‘신안보 세대’(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의 여파로 한국전쟁기의 20대 이후 가장 강력한 안보의식으로 무장한 세대) 등 지금의 청년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이름붙인 세대명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긍정·부정을 떠나 수많은 젊은이들의 일부 특징을 뽑아 특정한 이름을 붙여 공통된 특징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어떤 현상에 세대를 붙여 설명하는 것을 세대주의(generationalism)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는 로버트 볼이 1914세대(The Heneration of 1914)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정치가, 저널리스트, 대중적 지식인들이 세대의 중심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문제들을 (다른 개념들을 제쳐두고) 세대의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는 현상”을 말한다. 현재의 N포세대 담론과 과거의 신세대, 386세대의 담론으로 시대현상을 풀어내는 것을 세대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특정 인구 집단을 하나의 세대로 묶어 표현하는
세대주의적인 현상,
청년세대에서 범람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① “왜 하필 이런 한국에 태어났을까?”, “미국에서 살지 뭐라고 도로 나와?” 이따위 말은 외견 몰지각한 말이긴 하지만 노했거나 넋을 잃은 젊은 세대들이 흔히 발하는 말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몰지각하기만 한 말은 아닌 상 싶다.”
② ”요즈음 대학생들처럼 기성 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해 불만이 크고, 또 그 불만을 노골적으로 서슴없이 표현했던 세대는 없었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기성 질서에 대들고 무턱대고 순종하기를 마다하는 것은 결코 나쁜 현상만은 아니다.”
③ ”근대화 과정 속에서 기성세대는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역경을 이겨나가는 끈기와 인내를 몸에 익히고 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반면 어려움을 별로 겪지 않고 자란 젊은 세대는 쉽게 실증을 내는 조급함, 모든 일을 기피하는 인내심 부족으로 풍요와 절제, 편의와 인내가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치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세 인용문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세 인용문 모두 지금 당장 신문 사설에 실렸다 하더라도 전혀 어색함이 없어 보인다. 특히 첫번째 인용문은 요즘의 ‘헬조선’ 담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월간 ‘사상계’ 1961년 4월호에 실린 유석진의 글 <신세대와 구세대의 알력 : 세대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의 일부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글은 불만만 많고 약해 빠진 지금의 청년들을 질책하는 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월간 ’뿌리 깊은 나무’ 1979년 7월호에 실린 남기심의 <그래도 대학생은 잘 있다>에, 후자는 1990년 한국사회학회가 펴낸 ‘한국 사회의 세대 문제’에 각각 실린 글 중의 일부이다. 놀랍지 않은가. 청년에 대한 과거의 담론을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니. 결국 지금 나타나는 청년에 대한 말들은 과거의 담론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같은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정치 지형에서 청년세대 담론의 등장을 살펴보자. 2002년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국민참여경선에서 청년층의 유난히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대선 후보가 된 것은 한국 정치에서 세대 변인이 주목받기 시작하게 만든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역시 젊은 층의 압도적 지지를 기반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04년 ‘탄핵국면’ 당시 역풍에서 중장년층은 한나라당, 청년층은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이라는 투표 성향이 큰 주목을 받게 됐다. 과거의 대선 역시 연령별로 선호 후보가 갈렸던 사실이 있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젊은 층은 진보, 중장년층은 보수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보수측은 ‘청년의 보수화’, 진보측은 ‘88만원 세대’를 필두로 보수때문에 청년들이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진보를 밀어달라는 등의 프레임을 만들어 각각에 유리하도록 지금까지 청년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불쌍한 청년의 좌절
영화를 홍보하고 평론하는 데 있어서 역시 청년담론은 소비된다.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는 예고편 영상에서 ‘희망 없는 5포세대’라는 자막이 나오고 각종 기사에서 ‘3포세대들의 현실을 풍자한 블랙코미디’ 등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청년 문제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애초에 주인공인 ‘수남’이 학교에서 주판을 배우는 장면도 나오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열심히 일을 하여 집까지 구했지만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과 그에 따른 해결을 블랙코미디로 다룬 영화인 것이다. ‘수남’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가 아니며 그 윗세대의 캐릭터인 것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청년문제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한국의 불평등 문제를 다룬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안국진 감독이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사람들이 달인이 될 정도로 성실하게 일했지만 충분히 부유하지 못한 것에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한 인터뷰가 이를 뒷받침한다.
권오광 감독의 ‘돌연변이(2015)’ 역시 맥락을 같이 한다. 생동성실험에 참가했다가 생선인간이 되어버린 주인공 ‘박구’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우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내는 영화이다. 감독이 직접 “생선으로 변해가는 돌연변이 박구보다 더 이상하게 변해가는 ‘돌연변이들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라고 언급하였지만 이 역시 ‘박구는 삼포세대의 상징’이라는 평가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단순히 청년 문제를 말하는 영화가 아님에도 청년이라는 단어를 끌고오는 이유로는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구조적 문제’보다 ‘불쌍한 청년의 좌절’ 등의 단어가 홍보전략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반대로 홍보와 마케팅을 통해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읽어내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청년 담론'의 또다른 문제는 그 대상이 개별 존재로서의 청년이 아니라 청년세대라는 집단을 향한다는 것에 있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해 문제라는 담론은 반대로 연애·결혼·출산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전제 하에 수립된다.'정상적인 것을' 하지 못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애·결혼·출산을 개인의 가치관이나 신념등의 이유로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던 청년들과 경제적 문제로 애초에 연애·결혼·출산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청년들은 이 담론에서 타자화 되어 버린다.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의 김선기연구원의 책 ‘청년팔이 사회’는 이와 같이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쏟아지는 ‘청년담론’들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여기저기에서 남용되는 청년이라는 이름, 90년대 신세대에서 현재의 N포세대까지의 청년을 이름짓는 흐름, ‘청년’이라는 이름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 청년운동의 명암과 새로운 청년운동에 대한 제언 등을 담았다. 이 책을 통해 무심코 청년이라는 단어로 젊은이들을 규정하는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청년 당사자들 역시 무의식적으로 청년이 아닌 자들이 전하는 청년담론을 내면화 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