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브먼트] ‘뭉클’이 회복되는 떠남, 독서 그리고 행복

제목이 멋있어서 책을 펼쳤다. 문장이 도시를 걷는다고? 뭐지? 궁금했다. 프롤로그의 제목에서 여행과 관련 있을 것 같아보였다. 떠나고, 읽고, 행복하기. 여행 중에 책을 읽음으로 그 순간 존재가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마 저자는 그렇게 행복을 지어가는 사람인가 보다 싶었다.
목차를 보니 20개도 넘는 도시가 나온다. 여행가인가 했다. 글을 읽다보니 저자는 슬로베니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해가 되었다. 유럽은 하나의 생활권이라 거기서 산다면 쉽게 이 나라 저 나라로 돌아다니기 좋다. 내심 부러웠다. 책 하나 가방에 담아 여러 도시를 거닐며 독서를 하는 저자를 떠올려 보았다. 같은 책도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느낌이 다른 법이다. 그런 맛을 저자는 아주 알차게 누리는 사람이다. 그가 가진 행복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여행의 색다른 방법을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저자는 글쟁이답게 문장이 참 정갈하고 고급스럽다. 이런 여행에세이를 써 보고 싶구나 하는 욕구를 일으킨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 좀 더 행복한 여행을 꿈꾸는 이라면 한 번 쯤 읽고 자신만의 여행을 설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어 두 개의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체코슬로바키아가 익숙하다. 어릴 때의 기억이라 그렇다. 슬로바키아의 수도가 브라티슬라바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도시를 저자는 라디오스럽다고 했다. 소박하고, 친근하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나에게 집중하게 해 주기 때문이란다. 가 본 적은 없지만 라디오를 닮았다는 말에 도시가 그려진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익숙하여 정감이 있는 분위기일 것 같다. ‘작업 중인 남자’란 조형물 사진을 통해 저자는 이 도시가 라디오와 닮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프투이에서의 시인 고은 씨와의 만남을 글로 적어놓았다. 현란한 조명과 광기어린 음악이 폭주하는 카페에서 80이 넘은 노인이 격렬하게 춤을 췄다. 슬로베니아어로 번역 출간된 그의 시집을 기념하는 무대가 있은 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저자도 그의 시 번역에 참여했었단다. 그리고 당시 시인을 ‘그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자체로 완벽한 시였다’라고 평했단다. 하지만 수정해야했단다. ‘그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완벽한 거짓이었다. 고은태 그는 시도, 시인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거대한 속임수가 드러났을 때 저자는 너무 슬프고 화가 났던 것이다. 내 노모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사기를 잘 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에서 읽은 <뭉클하면 안 되나요?>에 대한 이야기는 와사비 덩어리를 한 번에 먹고 머리가 찡한 그러나 쾌감이 동반된 고통을 느끼게 했다. 그 책의 저자 마스다는 뭉클을 정의하기를 ‘자칫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새콤한 설렘’이라 했다. 한술 더 떠서 ‘성급한 뭉클함의 행복’이란 표현에서는, 뭉클함을 느끼려는 찰라 한 발 뒤로 물러서 차가운 이성의 이빨을 드러내려는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부끄러웠다.
손수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아저씨, 전철 안에서 문고본 책을 읽는 남자, 편의점에서 문을 잡아준 남중생, 자신이 한 칭찬을 기억하는 남자, 미끄러우니 조심해라, 뜨거우니 조심해라, 개를 조심해라, 바람이 많이 부니 조심해라, 감기 조심해라 같은 말을 해 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서 뭉클함을 느낀다는 마스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사소한 사람다움, 사소한 관심에 속으로 ‘와!’하는 탄성을 자주 지르며 혼자 미소를 지었던 감수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늙어버렸나 보다. 저자는 플리트비체의 바람과 햇살과 물빛과 하늘빛 그리고 폭포의 절경 앞에서 ‘뭉클’을 되찾았다고 한다. 플리트비체는 사진으로만 봐도 환상 그 자체다.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그곳에 가면 ‘뭉클’이 되살아날 것 같다.
벨기에가 사실은 벨기에가 아님을 처음 알았다. 우리가 말하는 벨기에는 네덜란드어로는 벨히어, 프랑스어로는 벨지크, 독일어로는 벨기엔, 영어로는 벨지움이다. 어쩌다 우리는 이 나라를 벨기에라고 부르는 걸까? 초콜릿, 와플, 맥주, 프렌치프라이, 축구, 스머프, 틴틴. 이 모두가 벨기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멋진 벨기에를 저자의 가족은 매우 위험할 때 방문한다. 바로 브뤼셀에 연쇄 폭탄 테러가 세 차례나 일어난 때다. 이미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가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딸이 꼭 가서 친구들을 ‘꼬옥’ 안아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세 식구는 위험천만의 벨기에 여행을 한다. 거기서 김연숙의 시집 <눈부신 꽝>을 펼쳤다. 그녀는 시를 통해 ‘공포는 지금 살아 있다는 표시이며, 공포는 크고 아름다운 문이며 그래서 공존의 평화는 그렇게나 힘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잠시, 안전할 뿐’이라 말하고 있었다.

남아메리카 하면 당연히 ‘열정, 요염 혹은 섹시, 유머’라고 빠르게 반응한다. 그런 남아메리카에 대한 평가를 듣자마자 가난한 남아메리카를 떠올리는 나는 삭막한 인간일까? ‘슬프게 치열한, 행복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어 보이는 혹은 영원히 행복을 잡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은’ 이란 형용사로 저자는 페루의 인상을 이야기한다. 그 땅 위에 펼쳐진 자연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으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한다. 자신이 느끼는 페루의 암울함은 자신이 ‘온갖 종류의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들의 삶을 자본의 눈으로만 본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들의 행복, 열정, 섹시함, 유머에 대해 정의 내릴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오직 그 땅에 사는 그들이 내릴 문제라고.
읽고 나니 가슴 한 가득 신선한 피를 수혈 받은 느낌이다. 아니면 탁한 공기만 들이쉬다 우연찮게 산소호흡기로 신선한 산소를 들이켠 걸지도 모르겠다. 미세먼지니, 초미세먼지니, 코로나바이러스니 하는 찜찜하고 침침한 세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뭉클’을 다시 소환할 수 있어 좋았다.
